탕평책은 세도정치의 원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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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srUL0394 댓글 0건 조회 198회 작성일 20-04-28 06:59본문
견제받지 않는 권력은 부패한다.
서론1.
조선 역대 왕에 대한 평가는 시대상황에 크게 영향을 받는 거 같은데 이는 잘못된 접근임.
구한말에 고종 대신에 정조가 왕이었다고 다를 바가 있었을까?
18세기에 정조 대신에 고종이 통치했다면 정조에 비해 심할 정도로 못 했을까?
역대 왕이 '무엇을 하고자 했는가?'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영정조를 '조'에 추존한 고종과 영정조는 크게 다르지 않음.
즉, 정치적 입장의 계승자라는 것. 그렇기에 개인 능력차가 있을지언정 큰 추세는 다르지 않았을 것.
서론2.
결국 영정조에 대한 평가와 고종에 대한 평가가 크게 다르다는 것은 자의적 평가 혹은 시대에 대한 평가를 왕 개인에게 돌리는 것임. (풍흉의 원인이 왕에게 있다고 생각하시는지?)
오히려 이들의 통치가 조선에 미친 영향은 동일함.
고종은 아관파천으로 근대화에 제동을 건 전제군주이고
숙영정조는 환국, 탕평책으로 사대부층을 박살내 외척일가를 견제할 세력을 없앤 자들임.
본론
양반층은 지금이야 씹선비니 뭐니 욕은 많이 듣는데
당대 조선에서 이들이 역할한 바를 무시할 순 없음. 이는 중앙정계와 지방자치로 나눠 볼 수 있음.
1-1. 탕평책 이전 중앙정계
알다시피 '전하, 신을 죽여주시옵소서'는 '죽일 수 있으면 죽여봐라'는 협박임.
왕이 추진하는 정책이 그만큼 정당성이 있느냐, 역사의 평가가 두렵지 않느냐는 '견제 역할'을 했다는 것.
이조 전랑이나 3사 모두 그러한 역할을 했었음은 굳이 더 말하지 않아도 될 것임.
1-2. 탕평책 이전 지방자치
조선 전기에 양반층은 유향소를 통해 향촌을 규율하였고 수령이 왕의 대리인이었지만, 서로 견제를 할 수 있었음.
태종과 세조가 유향소를 억누르고 경재소, 수령을 키운 것과 세종, 성종의 반대 정책은 사실이지만 큰 틀에서 균형이 유지된 것.
이런 상황에 숙영정이 탕평책 등을 통해 전제왕권을 강화한 결과 다음과 같은 상황이 벌어짐.
2-1. 탕평책 당시 중앙정계
환국과 탕평책으로 사대부, 붕당 위주의 정치가 종친/외척 중심의 정치로 변화함.
붕당을 형성한 양반층이 다 죽고 핵심 권력에 가까운 자들만 남은 것. 이들은 양반가문이지만, 외척가문으로 거듭났다.
무엇보다 툭 하면 귀양보내고 죽이는 걸 백 년 넘게 반복하는데 어느 세력이 남아나겠나.
사화를 버틴 힘이 지방의 서원, 향교였지만 영조도 이를 알았기에 서원 철폐, 산림 부정 등을 실시함.
결국 핵심 권력을 갖춘 종친/외척들만 남고 수월하게 왕권 중심으로 개편됨.
2-2. 탕평책 당시 지방자치
양반층이 몰락하고, 부농이 성장했던 것은 영정조의 탓이 아님.
그러나 향전을 유발하고, 수령에게 향안 수정 권한 등을 줘서 지방 양반층의 몰락을 가속화시킨 것은 부정할 수 없음.
수령의 권한은 더욱 강해졌고, 부농층이 이를 지지했음.
3-1. 탕평책 이후 중앙정계
다시금 역사의 가정. 정조가 몇년만 더 살아 정순왕후 김씨가 먼저 죽었다면 세도정치가 그렇게 심하진 않았을 것이다?
탕평책의 핵심은 전제왕권의 강화이고 양반층을 억누르기 위해 종친/외척에 의존함. (고종이 민씨 일가에 의지한 것과 다르지 않음.)
규장각이든 장용영이든 초계문신제 모두 왕권강화를 위한 것.
그렇기에 후대 왕의 권력이 선대만큼 확고하지 않다면 종친/외척이 득세하는 것은 필연. 그리고 이들이 횡포를 부려도 막을 수가 없다.
견제세력인 양반층을 다 박살냈으니.
설령 순조의 힘이 강했어도 그 다음 대에는? 마찬가지다. 견제세력은 이제 없다.
3-2. 탕평책 이후 지방자치
중앙정계와 마찬가지. 수령이 날뛰어도 아무도 못 막는다. 남아있는 서원과 양반층은 힘이 약해졌다.
탕평책 등은 오히려 삼정의 문란에 기여한 것.
따라서 동학농민운동의 시발점이 된 고부군수 조병갑의 횡포도 이 연장선에서 봐야 한다.
결론
이상의 관점에 새로운 사료가 필요한 게 아님. 국사 교과서에서 나오는 내용으로도 충분히 근거로 삼을 수 있음.
그저 관점을 전환한 것.
코페르니쿠스 이전에 천동설을 믿는 당대 과학자들의 눈에 별의 궤적은 아래와 같았음. 관측자료가 없었던 게 아니란 것.
(지구의 입장에서 별은 빙글빙글 돌면서 공전한다.) -나무위키 '천동설' 참조
다만, 지동설이란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고,
이 관점이 1) 너무나 단순명료하며, 2) 기존에 설명이 안 되던 것들을 설명했기에 받아들여진 것.
한국의 경우, 특히 정조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압도적인데 이는 1990년대 이후 나타난 현상임을 주지해야 함.
자세한 내용은
김백철, "1990년대 한국사회의 '정조신드롬' 대두와 배경: 나약한 임금에서 절대계몽군주로의 재탄생", 국학연구 18집, 2011
연구가 새롭게 되어서 그랬을까?
그런 면도 있겠지만, 박정희 시대가 이순신을 필요로 했듯, 90년대 이후 등장한 정치세력에게 정조가 필요했던 것.
이러한 연장선에서 2000년대 이후 정치사를 간단명료하게 평가할 수 있고, 또 2020년대 미래의 정치적 사건을 예측할 수 있음.
이를 적기엔 여백이 부족하므로 적지 않겠음.
추가논점1.
그렇다고 양반층이 무죄인 피해자냐. 물론 아님.
이들이 이기론이라는 형이상학을 중시했던 것 또한 사실이고,
환국, 탕평책의 본질을 꿰뚫지 못 하고 당장 집권하는 것이나 상대 당을 쫓아내는 데에 골몰한 것은 사실이기 때문.
그렇다고 양반층이 이기론에 빠져서 근대화를 못 했다는 입장, 양반층이 강력했던 것이 근대화 실패의 원인이란 입장은 잘못됨.
왜냐하면 한국 유학자의 철학적 성향은 다른 나라 유학자와 비교해 비판받아야 하는 것이지, 유학자라고 비판받을 지점은 아니기 때문.
추가논점2
근대화의 필수요건은 무엇일까?
많은 것들이 있겠지만, 추진세력이 없으면 공염불이다.
영국은 상공업계층에서 경제학자가 나왔고, 일본은 하급 관료에서 근대화론자가 나왔다.(심지어 사무라이가 전향한 경우도 있다.)
갑오을미개혁 당시 상황은 혼란했고, 반쯤은 일본의 강요로 의정부를 의원내각제로 개편하고 근대정책을 실현했으나,
아관파천으로 실패로 돌아갔다.
짜르 흉내나 내려는 고종에게 가만히 좀 있으라고 면박 줄 지식인 층은 19세기 후반엔 더 이상 강력하지 않았단 것이다.
견제받지 않는 권력은 부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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